하소연, 푸념,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

현명하신 어머니는 예전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선생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 말이 있잖아."
"그런 말도 있어요?"
"들어 본 적 없니?"
"음, 선생님들 똥은 뭐가 다른가?"
"학생이란 것들이 하도 속을 썩여서 개도 안 먹을 만큼 독하다는 말이야."
"맞는 말씀이네요."

요즘은 그렇지 않지만 예전에는 동네 개들이 사람 똥을 주워먹는 것을 많이
보았습니다. 아주 오래 전이죠. 요즘 학생들은 상상도 하지 못하겠지만요.
그만큼 개들도 배가 고팠다는 말이 될까요. 지금이야 호강하는 견공들도 있
다지만 이 나라에서 개는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식량이 되기도 하고 때가 되
면 팔려나가는 짐승이었지요. 아주 더 오래 전에는 먹을 게 하도 없어서 개
똥을 물에 풀어 먹었던 적도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아,
그냥 개똥 자체를 먹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개는 열심히 쏘다니며 무언가를
먹겠죠. 특히 곡식을 주워 먹은 경우에는 소화가 되지 않아 똥으로 그냥 나
오는 경우가 있었나 봅니다. 너무도 먹을 게 없던 시절에는 그 소화되지 않
은 곡식을 먹을거리로 삼았다는 것이죠.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같지만
있었을 법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쌀이 남아돌아 썩을 지경이라는 지금은
상상도 못 할 풍경이지요.
그런데 선생님들의 속은 개가 똥을 먹지 않게 되었어도 여전한가 봅니다.
참 우리네 어머니들은 현명하시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이
있나 봅니다.

친구 녀석 왈.
"야, 살다 보니까 이런 교활한 인간도 만나게 되네."
"무슨 일이야?"
"사무실 주인 할머니 말이야."
"야, 세상 거의 다 산 노인이 교활하면 얼마나 교활하다고 그러니?"
"지난 번에 사무실 집기를 얻은 게 있다며 가져다 놓겠다고 해서 그러라고 했
잖아."
"그랬었어?"
"자기가 어디서 얻게 되었는데 그냥 주겠다는 말이 있었다고 했잖아."
"아, 그것 말이지. 없어도 되는데 사무실 좁아지잖아. 거절하지 않았어?"
"아니, 그 할머니가 갖고 싶어하는 눈치라서, 그러면 그냥 가져다 놓으라고
했거든. 네가 세상은 도우며 살아야 되는 거라 했잖아."
"그러면 됐지. 왜?"
"그런데 오늘까지 연락이 없는 거라."
"아니면 말면 되지!"
"아까 전화가 왔는데, 자기가 옮길 수 없으니까 내가 배송하는 데 부탁해서
돈 주고 가져오라는 거야."
"응, 뭐...?"
"몇 만 원밖에 안 하니까 가져오래."
"엉, 왜 네가 돈을 내고 가져오냐? 그냥 주는 거라며?"
"그러게 말이다. 할머니가 얻기로 했는데 운반비를 나한테 떠넘길 셈이었던
것 같단 말이야. 아마도 처음부터 그럴 속셈이었던 것 같아서 영 불쾌하네."
"설마. 어쩌다 그렇게 되었겠지. 처음부터 그랬겠냐."
"그럴까?"
"그럴 거야. 사람은 믿어야 맛이라니까."
"하기야 의심하면 끝이 없으니까."
"하지만 너나 나나 영악하게 세상 살기는 글렀어. 세상을 다 이해하고 감싸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으니 말이야. 훗훗훗."
녀석은 묘한 쓴 웃음을 짓는다.

by 지지사 | 2009/11/04 00:35 | 슬픈 하루 기쁜 하루 | 트랙백 | 덧글(0)

하나를 보고 열을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를 보고 천을 매도한다.

어느 신문에 이런 기사가 올라 있습니다. 어느 모 대학에서 박사과정생이 학위를
얻으려 천만 원 정도를 심사 교수들에게 바쳤다는...그에 대한 댓글은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과 교수들은 돈에 미친 쓰레기>라는 식입니다.
           논문을 준비하며 몇 번의 학회 발표, 지도 교수의 수차례에 걸친 논문지도,
논문 쓰기는 최고의 스트레스를 안기고, 지도 교수의 차가운 비판의 코멘트에 절망
하며, 공개된 중간심사에서 쏟아지는 비판들을 어떻게든 감싸안으려 노력하고, 본심사에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하지 않으려 피를 쏟는 심정으로 논문을 다듬고, 교우들 앞에서
논문에 대한 칭찬만이 아니라 당연히 쓴디쓴 비평을 가하는데, 많이 빠져 있지만 그렇
게 험한(즐기면 행복한 것이나) 과정을 거쳐 얻는 것이 이른바 학위라는 것입니다.
재능은 없는데 돈으로 학위를 살 수 있다고요? 물론 그런 경우가 없으리라고는 생각
지 않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온갖 고통을 견뎌낸 사람들입니다. 겉으로
는 전혀 그랬던 적이 없는 것처럼 잊고 살지만 말이죠. 박사 학위는 그냥 오는 게 아
닙니다. 얼마나 지난한 과정이 있는지 모르시는가 봅니다.
            <어느 신문>의 글이 지도 교수나 심사의원인 교수들이 돈을 밝히는 것처럼
적자, 그 댓글이 가관입니다. 이 나라 교수들이 다 그렇게 쓰레기라네요. 단언컨대,
논문을 완성하고 학위를 따는 과정을 하나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 묘한 분위기에
이끌려 온갖 소문을 사실로 단정하며 쏟아내는 말들일 것입니다.
            교수들이 속물이라고요? 내가 아는 한, 그들은 학생들 앞에서 겸손하고,
학생들에게 해 줄 것이 없으면 자책하고, 자신의 능력에 대해 많은 회의도 하며,
제자가 찾아오면 기뻐하고 그 기억을 오랫동안 간직하며 고마워하는 사람들입니
다.
             힘든 논문 과정을 함께 해준 지교 교수에게 작은 선물이나 식사 대접을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제가 아는 한 제자가 만 원짜리 음료수 한 박스 사가지고
가도 기뻐하는 것이 그들입니다.
             사람 사는 세상인지라, 신문이 고발하는 행태를 보이는 교수도 물론 일부
있겠지요. 없다고 하면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대다수의 교수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사를 가면 좋아라 하시는 분들이 그분들이십니다. 제자가 찾아왔는데 어찌 기쁘
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입니다.
              학위 심사가 끝났다고 격려의 식사를 대접하시는 선생님, 집 근처까지
택시를 태워 바래다 주는 선생님(술을 한 잔 했으니), 여기 커피가 맛있다네 하시며
커피를 사주시는 선생님, 그런 선생님들이 더 많습니다.
              예전에 저는 세상이 하나를 보면 열을 헤아릴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실제
로는 하나를 보고 천을 매도하는 것이 훨씬 현실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교수들...생각보다 깨끗하고 괜찮습니다. 하지만 성녀를 바라지는 마세요.

by 지지사 | 2009/11/02 20:47 | 세상 관찰 | 트랙백 | 덧글(0)

처는 "신"과 동급(?)일지니 감히 대들지 말지어다

일본어는 동음이의어가 많이 있습니다. 특히 다른 한자인데도 음이
 같아서 생기는 경우이지요. 한국어에서도 꽤 많이 있고, 그것으로
말장난을 하는 경우도 있지요.
일본어에서 내 아내私の奥さん(妻)를 다른 사람이 부를 때 お上[かみ]さん
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보통은 奥さん이라고 하지요. 사전을 찾아
보시면 아시겠지만, お上[かみ]さん은 서민이 남의 아내를 가리켜
부를 때 쓰는 경우와 여관이나 음식점의 여주인을 가리킬 때 씁니다.
그런데 그 말과 똑같이 읽히는 것이 お神さん입니다. 사전에 등재된 단어는
아니지만 쓸 수도 있는 말이지요. 존경의 접두사 お 및 상대방에 대한 일정
한 존경의 뜻이 담긴 さん을 붙였지만 해석에서는 '신' 말고는 불가능한 표
현이기도 합니다. お神さん은 일반적으로 神様[かみさま]라고 하겠죠.
 나아가 妻(마누라)=神様(신)이라는 등식을 만들어 처의 위치, 특히 남편
입장에서 본 처의 위상을 말장난으로 표현하게 되는 셈입니다.
         제목에서도 썼듯, 신과 같은 위치에 있는 처에게 대들거나 하는 남편
은 참으로 대담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공처가(처를 무서워하는 남편)라느니, 처가 늦게 들어왔다고 감히
따져 묻는 대담한 남편이라느니 하는 말이 장난처럼 나눠진 일도 있고,
유행가 가사에도 등장한 적이 있지요. 한 번 남편이 되어 살아 보세요.
안 살아 봤다고요? 안 살아 보았으면 말을 하지 마세요!^^;
          내일은 제발 유쾌한 하루 보내시기를...

by 지지사 | 2009/11/02 19:30 | 음, 이런 일본어 표현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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